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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나의 이름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이름을 쓸 일은 많이 있는데 부르는 일은 극히 적어짐을 느낍니다. 내가 이런저런 문서에 내 이름을 남겨야 하는 일은 많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내 이름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 여성의 경우는 더 심하고, 특히 주부인 경우는 자신의 이름을 들을 일이 더더욱 없어집니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이나 사모님 등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는 사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 아빠나 직책이 그대로 호칭이 되곤 합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으로는 부모, 형제, 친구가 있습니다. 나이가 먹으면 형제들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사라진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성인이 되고 나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부모도 많습니다. 역시 결혼 후에는 ‘애비, 애미’로 호칭이 변하기도 합니다. 이름은 우리말에서 복잡한 특성을 갖습니다. 다른 언어에 비해서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이름은 사실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름에 온갖 좋은 뜻을 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저희 삼형제만 해도 이름에 용(龍), 성(星), 왕(王)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주 거창합니다. 막내는 누군가의 실수로 왕이 비슷한 글자인 옥(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름짓기도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우리 삼형제의 이름을 보면 용이 나타나고, 별이 보이며, 왕이 됩니다. 거창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이름에 참 진(眞)이 쓰이고, 착할 선(善)이 쓰입니다. 덕(德)이나 인(仁) 등도 단골로 쓰입니다. 물론 성별에 따라 혁(赫)이나 철(鐵) 등이 쓰이기도 하고, 숙(淑)이나 희(希)가 쓰이기도 합니다. 성 차별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부모님이 바라는 바가 아들과 딸에 따라 달랐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성과 관계없이 부르기 좋고 발음이 예쁜 이름도 많이 쓰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성의 차이는 느껴집니다.     저의 경우도 이제는 제 이름을 쓸 일은 많으나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부모님조차 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가끔가다 제 이름 전체를 부르는 사람을 만나면 깜짝 놀랍니다. 어색함을 느낍니다. 학생이 제게 ‘조현용 교수님’이라고 부르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선생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지칭하는 것은 가능하나 직접 부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때로는 이름이 불리지 않아서 섭섭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도 점점 이름을 안 부릅니다. 이름이 살아지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 ‘성경 인명 지명 사전’을 보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경의 이름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습니다. 어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노아는 위로, 다윗은 사랑함,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 요한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안나는 은혜, 한나는 자비라는 의미라고 나와 있네요. 저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이름도 있었습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이고, 아히야는 여호와의 동생이라는 설명입니다. 놀랐습니다. 오늘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이름은 그 뜻을 좇아가며 읽고 부르면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종종 이름은 결실이 되기도 합니다. 희망을 갖고 부르는 이름은 주문처럼 뜻을 이루어 주기도 합니다. 나의 이름을 다시 새겨 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름 이름 전체 부모 형제 저희 삼형제

2023-10-08

[독자 마당] 회자정리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불가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진다는 뜻이다.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요 이별은 조우의 시작인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부모, 형제, 자식들과도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평생을 같이 한 배우자와도 떨어져 홀로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살면서 용기와 가르침을 주었던 은사와 다정한 벗들, 그리고 따뜻한 이웃들과도 이별하는 슬픔도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죽음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라고 말했나 보다. 사람들은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와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아름답게 70~80년을 함께 살다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홀연히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혼자 떠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닥쳐올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홀로 떠나야 하는 두려움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편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다. 불가에서는 회자정리의 천리를 깨달으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인생의 마무리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다. 이것이 숙명이요 신의 섭리인 것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선행을 많이 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공수래 공수거’라고 했다. 저승길엔 마신 공기 한 모금도 못 가지고 간다. 자기가 움켜쥔 것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마음밭에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면 그곳이 천당이요, 그곳이 바로 극락이다. 회자정리,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 행로이다.  이산하·노워크독자 마당 회자정리 회자정리 이것 아집과 욕심 부모 형제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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